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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전

  • 조선약학회 창립부터 약학의 미래까지 대한약학회 70년의 발자취를 자세히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Scroll Down & 더보기를 클릭하세요.)

조선약학회의 시작

1945년 8월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인 약학자와 약사들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더욱이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약학회도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조국의 광복이 이루어졌지만, 분단된 채로 한국 약학자들이 1946년 4월 13일 서울약학대학에서 「조선약학회」를 창립하 였다. 회장에 도봉섭, 부회장에 한구동이 선출되었고 서무간사 심학진, 회계간사 이남순, 편집 간사 허금이 뽑혔다.

평의원에는 이세만, 홍원률, 김기환, 오상흠, 신덕균, 이호벽, 장배현, 우린근, 고인석, 채례석, 이길상 등이었다. 편집위원장은 김기우, 위원은 김근영, 김의섭, 심길순, 김동원, 이민재, 서만석, 김영은, 이인실 등이었다.


첫 학술모임

첫 학술모임이 1946년 12월 14일 서울약학대학에서 개최되었는데, 6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즉 고인석: 주류 중의 메칠알코올 검출에 대한 연구 조사, 우린근·김제훈: Polygala japonica Houttuyn의 성분 연구, 류경수: Syringa oblata var, dilatata의 성분 연구, 우린근·이용주: Rangium koreaonum Ohwi의 화색소 연구, 한구동·김영수: 붉나무 엽 중에 들어 있는 유기산에 대하여, 장배현: C.A.D.의 불하약 해설 등이다.

조선약학회는 그 회지를 「약학회지」라는 이름으로 1948년 3월에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6·25의 비극

그러나 1950년 비극의 6·25 동란이 일어났으므로 학회 활동이 모두 중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약학회의 중요 간부들이 북한으로 납치되거나 가버리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더욱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에 서울을 버리고 모두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광복 이후 한국 약학자들이 재출발시킨 조선약학회는 학회지도 발행하였고 학회로서의 제 모 습을 찾고자 하였으나 정치의 불안정과 좌우익의 극심한 충돌로 별로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1·4 후퇴로 좌익경향의 약학자들은 이북으로 가버렸으므로 피난지 부산에서 약학회를 재출발 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더욱이 서울약학대학이 국립서울대학교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그 필요성이 특히 커진 것이었다.

마침내 1951년 11월 27일 17명이 약대의 부산 사무실에 모여 협의한 결과, 약학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는 대책위원으로 한구동, 홍문화, 정경모, 한명수, 허금, 채례석, 이성규, 김근규와 김 종건을 선출하였다. 이들 위원들의 본격적으로 준비하여, 드디어 1951년 12월 16일 오전 10시 에 부산시청 회의실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총회에서 특별강연 세 가지와 회원의 논문 51편이 발표되었고 참석 회원수는 72명이었다.

선출된 임원진을 보면 회장에 한구동, 부회장에 허금, 간사에 홍문화, 이길상, 이선주, 이성 규, 채례석, 이민제, 그리고 평의원에 최병창, 최병욱, 정치우, 정경모, 김종건, 김근규, 김경호, 김태봉, 고인석, 이덕휘, 이호벽, 이남순, 우린근이었다. 편집위원장에 홍문화, 위원으로 채동규, 최병창, 김수억, 김영은, 고인석, 고현기, 권숙표, 이길상, 이상면, 이선주, 이완하, 이윤중, 백남호, 이성규, 임기홍, 노일협, 우린근, 심영섭이 피선되었다.

이 총회에서 학회의 이름을 「대한약학회」로 개칭하였다.

약학회지 재발간

그러나 학회지의 이름은 변경하지 않고 예전대로 「약학회지」로 발간하였다. 즉 1948년 3월에 창간호를 출간한 후 5년만인 1953 년 1월에 학회지를 발간하였는데 「약학회지」 제2권 제1, 2 합병호로 속간하였다. 따라서 학회 지의 이름만을 보면 「조선약학회」의 회지를 이어받은 것이다. 부산 피난시의 가장 큰 특징은 4개의 약학대학이 전쟁중에 신설되었다는 점이다. 종래 2개 약대에서 환도한 후에 5개의 약대가 더 신설되어 모두 11개 대학이 되었다. 전쟁으로 인하여 약대가 인기가 높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나온 「약학회지」는 제3권 제1호로서 4년 후인 1957년 10월에 발간되었다. 즉, 4 년이 지난 후에야 약학회지가 속간되었다는 것은 전쟁의 참상이 과학 발전에 막대한 지장을 주 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전쟁이 휴전된 후에 겨우 연구활동이 재개되었음을 볼 수 있다. 제4권 제1호는 1959년 9월에 속간되었다. 제5권 제1호는 이어서 1960년 10월에 나왔다. 1961년에는 약학회지가 나오지 않았다.

이듬해 1962년 5월에 제6권 제1호가 나오고 9월에 제2호가 출간되어 약학회지가 처음으로 연 2회 발행의 기록을 세웠다. 1963년에는 약학회지가 3회, 1964년에는 4회, 1965년 2회, 1966년에 다시 3회, 1967년에 2회, 1968년에 2회, 1969년에 3회, 1970년 2회, 1971년 3회, 드디어 1972년에 4회 발간하여 계간의 학회지로 되었고, 그 이후로는 계간으로 자리를 굳혔다.

약학회지 영문판 발간

약학회지가 계간으로 발전하게 된 원동력은 그 당시 우원식 편집위원장의 집념과 열성에 의한 것이었다. 그 때 회장과 기타 임원의 임기가 2년이었으나 회지 발간의 연속을 보장하기 위하여 편집위원장의 임기만은 3년으로 중임하는 정관 개정을 단행하였다. 결국 우원식 위원장은 편집 간사 4년과 위원장 5년을 합쳐서 학회지 편집을 9년간 맡아보는 진기록을 수립하였다. 특히 우원식 편집간사는 1966년 3월에 약학회지 제10권 제1호를 완전 영문으로 된 학회 창립 15주년 기념호로 출간하였다. 6년 뒤에 우원식 편집위원장은 「약학회지」 제16권 제3호를 영문으로 된 논문만을 실린 완전 영문판으로 1972년 9월에 발간하였다. 그 후 매년 제3호를 영문판으로 1977년 9월까지 6회에 걸쳐 발간하는 업적을 세웠다.
1976년 12월에 발간된 제20 권 제4호는 학회 창립 25주년을 기념으로 영문판으로 편집되었다. 한구동 초대 회장은 1967년 홍문화 회장에게 인계될 때까지 무려 15년간 학회 발전에 봉사 하였다.

뉴스레터 파루마콘 창간

1975년 9월 25일에 약학회의 뉴스레터로서 파루마콘(Pharmacon)을 창간하였다. 여기에는 학회의 각종 업무, 회의, 통보, 회원의 동정 등을 수록하였다.
1983년 6월 30일에 파루마콘에 논문초록, 해외토픽 등을 게재하여 체제를 확대, 개편하였다. 뿐만 아니라 1983년에는 파루마콘 을 3회 발간하였다. 드디어 1984년에는 4회 발간하였으므로 계간으로 되었다. 이와 같이 파루마콘이 꾸준히 14년간 이어 오다가 1997년에 팜월드(PharmWorld)로 개칭되었다.

약학회가 전쟁중에 재건되어 나름대로 꾸준히 성장하여 왔으나 괄목할 만한 진보가 없었고 1970년대에 와서 답보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약학회가 재건되어 1952년 초대 한구동 회장이 취임한 이래 1976년까지 25년 동안 회장은 모두 서울대학교 교수가 선출되었고 1970년만 채례석 회장이 한 번 피선된 것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회장을 보좌하여 학회 실무를 맡아 보는 간사들은 대개 서울대학교의 젊은 교수들 에게 넘겨졌었다. 따라서 다른 대학 교수들의 참여도가 점차 감소되었고 관심과 사기가 저하되었다. 한때는 진흥위원회를 신설하여 5년 간이나 운영해 보았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결국에는 임원 중의 일부 교수들이 약학회를 이대로 놓아두었다가는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획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반 회원들의 참여도를 높이고 회원수를 배가하고 각 시도의 지부를 활성화하며, 회장은 서울대학교와 다른 대학간에 교대로 맡기기로 합의하였다.
나아가서 완전 영문으로 된 학술지를 별도로 창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새로운 각오와 비전

새로운 각오와 비전을 가지고 출범한 1977년도 임원진을 보면, 회장에 정기용, 부회장에 노 일협, 장억규, 이왕규, 우원식, 간사장에 최석상, 간사에 이해빈, 윤혜정, 이영남, 부간사에 손동헌, 정규선, 감사에 고인석, 최종인, 편집위원장에 김병각으로 구성되었다. 정기용 회장의 진두 지휘 하에 각 대학과 제약회사에 지부장을 임명하여 전국 조직을 재정비하고 활성화하였다. 학회지를 인쇄하는 인쇄소도 그 당시 우리나라 최고급 인쇄 설비와 기술을 자랑하는 (주) 보진재 (영등포구 당산동 소재)로 변경하였다. 회장단이 각 제약회사를 방문하여 재정적 후원을 받아왔다. 각 회원에게 보내는 통지서와 회지를 발송하는 작업은 이화여자대학교 약학대학의 교수, 조교 및 대학원생을 총동원하여 일사불란하게 수행하였다.

APR의 창간호의 출간

1977년 3월 10일에 열린 편집위원회는 새로운 영문 학회지를 연 2회 발간할 것을 집행부에 건의하였고 집행부는 이를 승인하였다. 1978년 1월 25일에 영문학회지의 명칭을 두 가지 추천하여 회장단이 Archives of Pharmacal Research (APR)로 결정하였다. 1978년 2월 17일에 새 학회지의 집필규정을 영문으로 확정하였다. 드디어 1978년 12월에 김병각 위원장은 APR의 창간호를 출간하였다. 이어서 1979년에 2회 1980년에 2회 발간하였다. 1981년에 김낙두 편집위원장이 계속해서 연 2회 APR을 출간하였다.

첫 학술대회 개최 및 해외지부

1977년 3월 19일에 드디어 각 지부의 분회장 회의를 처음으로 소집하여 학회의 활성화 방안과 참여도 제고방법을 심도 있게 논의하였다. 1978년 7월 10∼13일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기총)가 재미 한국인과학자들을 국내에 초청하여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참석한 약학자들을 인사동에 있는 「경향」에 초청하여 1978년 10월 14일에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미국의 대학이나 연구소 혹은 정부기관이나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한국 약학자들을 규합하여 지부를 만들기로 합의하였다. 이듬해 4월에 재미 지부를 결성하였고 초대 지부장에는 Bristol 제약회사 연구소의 신정택 박사가 선정되었다. 이것이 약학회의 첫 해외지부가 되었다.
20세기 이론약학(physical pharmacy)의 창시자이자 물리약제학의 대가인 미국의 Kansas 대 학교 약대 Takeru Higuchi 석좌교수가 일본에서 초청강연을 한 후에 한국에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약학회는 기꺼이 특별강연회를 1978년 5월 24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개최하였다. 그날 Higuchi 석좌교수는 prodrug에 관하여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강연회가 한국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강연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수년 후에 애통하게도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William Higuchi 교수는 초빙연사로서 여러 번 다녀갔다.

10·26 사태로 집회와 출판물 금지

1978년도 총회는 10월 28일에 중앙대학교에서 성대히 개최되었다. 정체기에 있었던 약학회를 역동적으로 활성화시킨 정기용 회장과 임원의 2년 임기는 끝나고 새로운 임원진이 총회에서 인준되었다. 회장에 이왕규, 부회장에 우원식, 용재익, 이윤중, 서석수, 감사에 한관섭, 이상섭, 간사장에 유병설, 간사에 용군호, 박만기, 권순경, 부간사에 정규선, 김종국, 편집위원장 김병각 으로 구성되었다. 이 임원진이 1979년과 1980년에 학회 활성화 사업을 계속 추진하게 되었다.
한국의 제약산업이 앞으로 GMP 제도를 도입해야 하므로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1979년 4월 19일에 대한약품공업협회와 공동으로 GMP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5월 26일에는 항암제에 관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1979년 총회는 예년과 같이 19월 28일 전후에 부산대학교 약대에서 개최하기로 되어 모든 분비가 완료되었음을 임원진이 부산에 내려가 직접 확인까지 하였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10·26 사태가 돌발하여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모든 집회와 출판물은 계엄사령부의 허가가 없으면 금지되었다.

부득이 제28회 총회는 연기되었으며 12월 1일 보건연구원(서울 불광동)에서 겨우 개최되었 다. 이례적으로 심포지엄은 한국생약학회와 공동으로 「국산 생약의 생리활성물질」에 관하여 개 최하였다. 물론 약학회 총회도 계엄사령부의 허가를 받은 후에 열렸으며 약학회지와 APR도 출간할 때마다 한 부씩 계엄사령부(서울시청)에 제출하고 허가를 받고서 각 회원에게 발송하였다.

약학회지의 명칭

1980년 4월 26일에는 향정신성 약물에 관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대한약품공업협회와 공동으로 GMP에 관한 세미나를 7월 11일에 개최하였다. 제29회 총회 및 학술대회를 서울대학교 에서 12월 6일에 열었으며 초미의 관심사였던 「약학교육 발전에 관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1963년 6월 22일에 열린 편집위원회는 외국 학회와의 교류를 넓히기 위해 약학회지를 미국, 일본 및 동남아 각국의 약학회 그리고 미국의 Ohio주 Columbus시에 있는 Chemical Abstract Service사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드디어 1964년 2월 26일에 약학회지 7권 1호, 2·3호와 4호 각 2부씩을 Chemical Abstract Service 사에 발송하였다. 그 이래 약학회지에 실린 논문의 영문초록이 Chemical Abstract에 게재되고 있다. 그 당시의 약학회지의 앞표지에 국·한문으로 된 회지 이름과 목차가 있었고 뒷표지에는 영문 차례와 J. of Pharmaceutical Society of Korea라 는 잡지명이 인쇄되어 있었다. Chemical Abstract에 나오는 영문초록에는 당연히 그 논문이 실린 학술지의 이름과 권호수 및 페이지가 들어 있다. 그런데 약학회지의 영문명이 「Yakhak Hoeji」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 이름은 약학회에서 제정한 것이 아니었다. 즉 Chemical Abstract Service사가 각 분야별로 Abstractor들을 임명하여 영문초록을 담당하도록 하고 있었 는데, 이들 중의 약학 분야 담당자가 Chemical Abstract Service사의 규정에 따라 붙인 이름이었다. 약학회지보다 먼저 나온 일본약학회의 「약학잡지」도 일본식 이름대로 「Yakugaku Zasshi」 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 식으로 15년 이상 계속되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Chemical Abstract 는 전세계의 도서관들이 구독하는 널리 애용되는 초록집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 현실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78년 제22권 1호의 뒷표지에 「Yakhak Hoeji」라는 명칭을 부득이 함께 병기하게 되었다. 즉 Chemical Abstract Service사의 관행을 받아드리게 된 연유 이다.

정기용 회장과 이왕규 회장의 뒤를 이어 받은 노일협 회장은 1981~82년의 임원진을 더욱 강팀으로 구성하였다. 그 이유는 약학회 창립 30주년 기념 행사를 크게 차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임원진을 보면 부회장에 김수억, 이상섭, 한병훈, 유영종, 간사장에 용군호, 서무간사에 박만기, 천문우, 재무간사에 정규선, 편집간사에 김종국, 부간사에 장일무, 최응칠, 감사에 허금, 정기용, 편집위원장에 김낙두, 각 분야별 분과학회장에 임중기, 김재완, 이민화, 손동헌, 채동규, 권숙표, 김일혁이었다.

대한약학회 30주년 기념

30주년 기념 행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위하여 그 기념사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명예위원장에 한구동 초대회장, 위원장에 홍문화, 부위원장에 김수억, 이상섭, 한병훈, 유영종, 기념대회장에 노일협 회장, 그리고 4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드디어 1981년 10월 30~31일 양일간에 걸쳐 약학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와 총회를 노일협 회장의 주도하에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약학회는 융성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대회의 자세한 내용은 ‘제VI편 약학회 활동’에 기재되어 있다. 약학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책이 「대한약학회 30년사」라는 제목으로 1983년 1월 3일에 발간됨으로써 기념사업은 마무리되었다.

사단법인의 설립

약학회의 숙원사업의 하나는 사단법인의 설립이었다. 법인 인가신청을 위하여 1984년 3월 17일에 법인 발기 총회를 개최하였다. 따라서 이상섭 회장과 박만기 간사장을 위시한 임원진은 재단 설립에 필요한 기금을 만들기 위해, 각 제약회사를 방문하는 모금활동을 열성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984년 12월 20일에 사단법인 설립이 허가되었다. 드디어 1985년 2월 18일에 사단법인 등록을 완료하여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사단법인 대한약학회’가 수립되었다.

대한약사회가 종로구 관철동 시대를 마감하고 서초구 서초 3동에 4층 건물의 새 회관을 건축하여 이사함에 따라 약학회 사무실도 서울대학교 약대로부터 약사회관 2층으로 1984년 6월에 이전하였다. 그 당시 약사회 길병전 회장과 약학회 이상섭 회장은 약사회와 약학회가 긴밀한 협동관계를 이룩하려면 한 건물에 있어야 한다는 소신에 일치하였고, 따라서 길병전 회장이 새 건물의 2층 첫째 방을 마련하여 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1984년은 약학회의 역사상 가장 뜻깊은 해가 되었다.

1975년에 창간된 약학회 뉴스레터인 파루마콘이 1983년도에 3회 발간되었고 1984년에 4회 발간함으로써 계간으로 승격되었다. 약학회지도 1972년 이래 계간이었으나 1984년도부터 매년 6회 발행하여 격월간으로 발전하였다. 2002년부터는 약학회지의 크기(판형)가 A4(국배판) 크기로 개편되었다.

국제학술대회 개최

Archives of Pharmacal Research도 꾸준히 발전하여 1985년부터 1994년까지 계간으로 출간되었으나 1995년에 마침내 매년 6회 발행하는 격월간으로 진보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향우 편집위원장이 1993년부터 Archives of Pharmacal Research의 크기를 A4 크기로 확대시킴으로써 국제적 수준의 학술지로 손색이 없게 향상되었다. 그러므로써 우리 약학회는 국문지와 영문지를 합하여 매달 학회지 1호씩을 출간하는 국제 수준의 학회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1990년도 우원식 회장은 학회 창립 40주년이 되는 1991년에 대대적인 국제약학회의를 개최하고자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학술대회의 제목은 「신약개발 국제학술대회」로 하였고 그 조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장은 우원식 회장이 맡았고 사무총장은 김종국 편집위원장이 겸직하였다. 집행위원회는 한병훈, 김병각, 김낙두, 이은방, 임중기, 문창규, 박만기, 손동헌으로 구성되었다. 심지어 국제학술대회를 도와주는 전문업체와 계약을 체결하여 명실상부한 국제학술대회를 6일간에 걸쳐 진행하였다. 이 학술대회 기간 동안 영문으로 된 신문을 매일 신속하게 발행하였음은 특기할 만하다.

마침내 1991년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6일간 서울의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신약개발 국제학술대회」를 성대히 개최하였다. 이 대회의 자세한 내용도 ‘제V편 약학회 활동’에 기재되어 있다.

새 분과 학회 추가

약학회 산하의 분과학회는 기본적으로 7개 전후였는데 1971년에 한때 세분하여 15개까지 분과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후 1972년에 이들을 다시 병합하여 7개 분과회로 축소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새 분과 학회가 추가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1986년에 병원약학 및 물리약학의 2분과학회가 신설되었고 1989년에 의약품제조학이 추가되었다. 1991년에 미생물학 및 병태생리학의 2분과학회가 설립되었다. 1997년에는 임상약학 및 한약학의 2분과학회가 증설되었다. 그러나 의약품제조학과 약화학이 약품화학 분과학회로 통합되기도 하였다.

한국 약학 80주년 기념

1995년은 한국에서 근대 약학교육이 시작된 지 8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다. 이를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정원근 회장(1993~94년)이 적극 준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직위원회에 25명을 임명하고 그 위원장에 정원근 회장, 사무총장에 문창규, 집행위원회 위원장에 천문우 간사장, 학술위원회 위원장에 이상섭 등 강팀을 구성하였다. 「한국 약학 80주년 기념 종합약학학술대회 및 국제심포지엄」은 1995년 6월 22~24일에 걸쳐 3일간 삼성동에 있는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거창하게 거행되었다. 명예대회장에 민관식(대한약사회 명예회장), 주관대회장에 김일혁 회장(1995~96년), 공동대회장에 이금기, 정종엽, 김창종으로 구성되었다. 이 대회의 자세한 내용도 ‘제V편 약학회 활동’에 정리되어 있다.

APR이(가) 미국 ISI사의 SCI 리스트(expanded)에 등재

이듬해에는 약학회 숙원사업의 하나가 또 이루어졌다. 즉 1996년 2월 1일에 우리의 Archives of Pharmacal Research가 미국 Institute for Scientific Information사의 Science Citation Index의 리스트(expanded)에 등재되었다.

제7회 영지버섯 국제심포지엄

국제 영지버섯 심포지엄을 제3회부터 제7회(1991~1997년)까지 약학회가 개최하였다. 중국, 일본, 미국, 소련, 독일, 대만, 홍콩 등의 영지를 연구하는 의학자, 약학자 또는 과학자들을 초청하여 국내 학자들과 함께 학술발표회를 미생물학 분과학회가 주관하여 실시한 것이었다. 심지어 소련의 모스크바에 있는 우주의학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Space Medicine)에서는 우주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우주비행사에게 영지엑스를 복용시켜 체력 회복이 촉진되는 결과를 얻었으며 그 우주비행사가 직접 참석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는 특례를 남겼다. 심포지엄의 경비를 절약하여 남은 금액은 약학회 기금에 매번 기부하곤 하였다. 제7회 심포지엄을 1997년 6월에 개최하였는데 불행히도 그 해 12월에 IMF 외환사태가 터져 나와 그것이 후속되지 못하고 있다.

「약학연구 I, II」 시리즈로 출판

약학회 회원 중에서 회갑을 맞이하면 그 기념으로 전문분야의 동료와 제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단행본을 『약학연구』라는 제목으로 시리즈를 발간하게 되었다. 1998년 4월 4일에 첫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그후에 두번째 책이 출판되었다.

1997 ~ 98년 문창규 회장

1997~98년도 문창규 회장이 약학회 업무를 맡았을 때는 1997년 12월에 IMF 외환사태가 돌발하여 경제적으로 극히 어려웠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원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무난히 학회 운영을 완수하였다. 1998년 Archives of Pharmacal Research(Vol. 21)의 No. 6부터 1999년(Vol. 22)의 No. 6까지는 대한약학회와 미국 SBR(The Society of Biomedical Research)과 협력하여 발간하였으며 잡지 표지에 Published by the Pharmacentical Society of Korea in Association with the Society of Biomedical Research(USA)라고 표시하였다. 이는 이 영문지를 Science Citation Index의 정규 리스트에 올리기 위해서는 재미 한인 생명과학자의 투고 등을 유인할 필요를 느꼈기 대문이다. 그러나 2000년(Vol. 23) No. 1부터는 다시 SBR의 협력 없이 잡지를 발간하였는데 이는 대다수의 회원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다.

1999 ~ 2000년 김창종 회장

1999~2000년도 김창종 회장은 약학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대비하여 그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또한 약학회의 자체 건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회관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 기금 모금에 나서기도 하였다. 21세기 약학교육을 대비하여 ‘21세기 약학발전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이민화 위원장을 선임하였다.

2000년 4월 20일에 부산의 경성대학교에서 춘계학술대회를 개최하였고, 이 대회의 행사중에 ‘21세기 약학교육의 발전 방향’을 설정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하였으며, 그 내용을 집성하여 단행본으로 2000년 12월 10일에 출간하였다.

‘제V편 약학회 활동’의 서두를 보면 두 학회지에 게재된 논문 편수가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다. 이 그래프들을 보면 약학회지와 Archives of Pharmacal Research에 실린 논문 편수가 1985년 이후부터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1995년 이후에는 급격히 늘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사실이 이 시기가 약학회의 역사상 융성기에 해당함을 잘 명시해 주고 있다. 그 결과 2003년부터는 영문지를 격월간에서 월간으로 증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2001 ~ 2002년 박만기 회장

2001~2002년도 박만기 회장은 약학회와 인연이 깊어서 일찍이 재무간사(1979~80년), 서무간사(1981~82), 간사장(1983~86), 편집위원(1973, 77~78, 81, 83~86), 분과학회장(1989~90) 등등 해외 유학 기간 외에는 항상 약학회의 핵심 업무를 도맡아 수행하여 왔었다. 그러한 능력으로 학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2001년 10월 17~19일에 숙명여자대학교 약대의 신축 건물에서 화려하게 개최하였다. 이 기념대회의 내용은 제VI편에 별도로 기재되어 있다.

대한약학회는 1951년 12월 16일 부산 시청에서의 창립총회를 기점으로 5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여 왔다. 그러나 앞으로 약학회 창립 60주년, 75주년, 100주년 기념행사가 어떻게 준비될른지 기대된다. 「조선약학회」가 1914년에 시작된 것을 기점으로 계산할 것인지 혹은 1946년의 재창립을 창립 연도로 하여 창립 기념행사를 재조정할 것인지도 몹시 궁금해진다. 약학회를 사랑하는 모든 회원들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볼 의미가 있는 과제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 대한약학회 발행: 『대한약학회 30년사』, p.369 (1982).
  • 홍문화 저: 『약사산고』, p.476, 동명사 발행 (1980).
  • 홍현오 저: 『한국약업사』, p.442, 한독약품공업주식회사 발행 (1972).
  • 대한약학회 회의 기록 및 기타 자료 (1977~80).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병각

녹암 한구동 박사 추모 학술상 제정

제42대 박만기회장의 임기를 이어받은 제43대 김길수회장은 2003∼2004년 2년간의 업무를 시작하였다. 관계와 학계에 두루 경력을 쌓은 김회장은 정부 등 관계와 제약단체들의 지원을 받아 학회발전을 도모하였다. 역대회장들과 마찬가지로 APR의 SCI 등재, 약대 6년제 추진 등 약학회 숙원사업들을 해결코자 업무를 수행하였다. 2003년 4월 17∼18일 영남대 국제관에서 춘계학술대회를 열었으며 총 5개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약 450여 편의 논문이 성황리에 발표되었다.
한편 이 대회에서는 녹암 한구동박사 추모학술상을 제정하였다. 2003년 9월에는 대한약학회 홈페이지(www.psk.or.kr)가 새롭게 개편되어 학회의 전반적인 행정사항이 온라인화 되기 시작하였다.

제52회 총회 및 추계학술대회

2003년 10월 17∼18일 서울 코엑스컨벤션센터에서 제52회 총회 및 추계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어서 2004년 4월 22∼23일 충남대 국제문화회관에서 춘계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특히 식약청과 개국약학분과회가 참가하여 약학학술대회의 지평을 넓혔으며 식약청과 같은 정부기관을 학회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2004년 10월 21~22일 덕성여 대 대강의동에서 제53회 총회 및 추계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약 50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 으며 다양한 심포지엄과 함께 ‘의약품품질보증과 validation’ 주제로 워크숍도 개최되어 약학회 의양적 팽창에 이어서 질적 변화도 감지되었다. 한편 2003년 3월 3일 제5대 식품의약품안전 청장으로 심창구 회원(서울대 약대 교수)이 임명되었다. 이는 제2대 청장으로 재임한 영남대 약대 허근교수에 이어 약학계의 경사로 기록되었다.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의 춘·추계학술대회

제44대 회장에 서울대 약대 김종국교수가 당선되어 2005∼2006년 2년간의 회무를 맡게 되었다. 취임사로서 전임회장의 사업을 이어받았으며 보다 국제화된 학회를 만들고 이를 위해 일본, 중국과의 교류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한편 2005년 4월 대한약학회의 학술위원장인 서울대 약대 김규원교수가 2005년 호암의학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2005년 4월 18∼19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춘계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신약개발의 전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한 결과 대한약학회가 우리나라 신약개발의 산실이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였다. 회원 등 약 1,000여 명이 참석하여 양적으로나 질적 으로나 수확이 컸던 학술대회였다.

2005년 11월 28∼29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제54회 총회와 추계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춘계학회에 이어서 신약개발에 계속적인 초점을 맞추어‘약 개발을 위한 약학연구네트워킹’이라 는 주제로 약학의 특성인 기초연구부터 제품화 기술은 물론 규제과학까지 폭넓은 연구스펙트럼 을 다루어 학술적 의의가 컸다. 2006년 1월 13일 약학대학 6(2+4)년제로의 법 개정이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25조에 의거 공포되었다.
이는 그동안 대한약학회를 중심으로 한 약학계 노력의 결과로서 세계화되는 국제조화의 필요성이 점증되는 때에 우리나라 약학발전에 큰 디딤돌이 되었다. 2006년 4월 16∼17일 부산 벡스코에서‘신약개발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춘계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첫날 세션을 일요일에 배치하였으며 이로써 개국약사 및 병원약사들의 참여가 두드러진 특징을 보였다. 이어서 2006년 11월 6∼7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제55회 총회 및 학술대회에서는 국가적 아젠다인 한미 FTA 협상과 국책과제인 나노/바이오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신약개발 등의 주제로 진행되었다.

Springer사와 영문지(APR) 전자출판 계약

제45대 약학회장에 동덕여대 전인구교수가 취임하여 2007∼2008년 2년간 집무하게 되었다. 신임회장은 대한약학회의 숙원사업해결 및 국제인지도제고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07년도 춘계학술대회는 5월 11∼12일 광주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지방에서 개최되었지만 등록인원이 1,000여명 이상으로 집계되었을 정도로 참여율이 높아졌다. 그해 8월 20일에는 학술지출판의 국제배급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프링거(Springer)사와 APR의 전자출판계약이 성사되었다. 이로써 APR은 스프링거사의 인쇄저널의 해외배포 및 전자저널의 구축과 시스템서비스를 받게 되었다.

세계약학연맹(FIP) 가입

또한, 9월 1일에는 대한약학회가 세계약학연맹(FIP)에 가입하였다. 2007년 11월 7∼8일 제 56회 총회 및 추계학술대회가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개최되었다.‘약학의 진보를 위한 탐구’ 라 는 주제로 각종 심포지엄이 열렸다. 특히 학술프로그램 중에는 국제화 추세 하에 약학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1회 팜월드포럼이 결성되어 개최되었다. 2008년 1월 22일에는 서울대 약대 오당 이상섭명예교수가 기금 1억원을 학술대회 해외연구자초청 및 운영자금으로 기탁하였다. 2008년 3월 26일에는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제2회 팜월드포럼이 열렸다.
대한약학회(회장 전인구)는 2008년 3월 17일 일본약학회(회장 히데오 우쯔미)와 양국 학술교 류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양 단체는 한일관계우호증진과 학술교류에 상호협력하 기로 하고 각국의 정기학술대회에 연자들을 파견키로 함으로써 양국의 학술교류증진과 우리나 라 약학의 위상제고에 기여하였다.

2008년 4월 30일∼5월 3일‘신약개발부터 인간복지까지’라는 주제로 춘계국제학술대회가 열 렸다. 약학교육의 비전과 인프라 등 18개 심포지엄으로 제주 국제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되었는데 개최지가 제주도라는 지역적 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400여명이 등록하는 등 대성황을 이루어냈다. 이로써 대한약학회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학회에 손꼽힐 정도로 성장하였음을 학계에 과시하였으며 회원 상호 간에도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특기할 것은 2007년 9월에 대한약학회가 가입한 세계약학연맹의 카멜미드하 회장의 초청기조강연이 있었다. 한편 대한약학회에 약료경영학분과회가 새로 추가되었으며 오당심포지엄기금으로의 명칭변경이 있었다. 2008년 10월 11일 제3회 팜월드포럼을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약학대학 6년제의 약사인력 양성정책’주제로 개최하였다.

2008년 10월 23∼24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제57회 총회 및 추계국제학술대회가‘신약개발 부터 인간복지까지’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3월에 MOU를 맺은 일본약학 회 테수오 나가노회장(동경대교수)의 초청기조강연이 있었다. 2008년 11월 13일 가송재단과 가 송약학상 제정 협약식을 거행하였다. 이 상은 우수약학연구자 뿐만 아니라 사회활동이 왕성한 약학계 인사에게도 수여되는 취지로 제정되었다.
한편, 2008~2009년 회원명부가 발간되어 약 1,600여 명의 회원이 수록되었다. 또한 10월 6 일‘나의 미래공부-약학편’을 펴냈다. 12월 15일 약학용어위원회(위원장 심창구교수)에서는 1만 1,000 여개 어휘를 수록하여 방대한‘약학용어집’을 편찬하여 배포하였다. 2008년 3월 8일 윤 여표회원(충북대 약대 교수)이 제9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으로 임명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회장 취임

대한약학회(회장 전인구)가 2008년 7월 15일 발표한 제 46대 회장 및 수석부회장 선거공고 (대약 제 08-98호, 2008.7.15)를 철회했다. 대한약학회는 7월 25일 학회 홈페이지를 통해“선거 공고에 대한 주무관청으로부터의 개정정관(수석부회장제도 도입)허가가 보완요청(대의원 총회 의결정족수)으로 지연돼 효력이 발생할 수 없게 됐다”고 밝혔다.

이에 재공고를 거쳐 이전 방식대로 회장선거를 한 결과 제46대 회장에 서울대 약대 김영중교수가 2009∼2010년 2년간 취임하였다. 김회장은 대한약학회 역사상 최초의 여성회장으로서 학회발전에 의의가 크다는 중론이었다. 김회장은 약학진흥과 연구개발 진작을 통한 제약산업 육성 및 국민보건 향상에 공헌한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또한 약학인의 유기적 교류와 역동적 국제적 학술활동 진흥으로 세계수준의 약학자를 육성하는 것을 약학회의 목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취임사에서 국제학술대회와 다양한 학회활동을 비롯한 내실화에 힘쓰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한편 2009년 1월 약학대학 6년제 출범하게 되어 향후 2년간 신입생을 뽑지 못하는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제4회 팜월드포럼

2009년 5월 7∼8일에 대전 컨벤션센터에서‘약학기술혁신촉진’주제로 춘계학술대회를 개최 하였다. 2009년 6월 1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제약산업의 글로벌 전략 및 육성정책을 주제로 한 제4회 팜월드포럼이 열렸다. 2009년 10월 15∼16일 ‘신규 복합제 제제 개발전략’을 주제로 제58회 총회 및 추계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10년 4월 15∼16일에는 대구엑스코에서 춘계 총회 및 국제학술대회를‘신약개발을 위한 통합네트워킹’주제로 개최되었다. 약물전달의 최적화를 위한 전략 등 심포지엄과 특히 일본약학회가 참여하는 심포지엄이 마련되었다. 이것은 일본약학회와의 2008년 MOU에 따른 국제심포지엄으로서 양국 간 지속가능한 학술교류의 공식 테이프를 끊는 첫 행사이었다.

정관 개정 (회장 선거 관련: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변경)

이번 총회에서는 제47대 회장선출을 위한 선거제도에 관한 정관개정이 이루어졌다. 개정내용은 회원여론수렴을 거쳐 대한약학회 사상 처음으로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꾼 것이다. 한편 ‘오당(이상섭교수) 심포지엄후원기금’을 ‘오당 강연후원기금’으로 변경하는 건도 통과되었다. 2010 년 6월 21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제5차 팜월드포럼이‘약학대학 학제개편기의 과제와 발전방안’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2010년 10월 20∼21일 청주 라마다플라자호텔에서 ‘신약개발을 위한 최첨단과학기술’이라는 주제로 제59회 총회 및 학술대회가 열렸다.
약학회 사상 첫 직선제의 제47대 회장으로 경희대 약대 교수 정세영회장이 당선되어 2011∼ 2012년 2년간 회무를 맡게 되었다. 첫 직선제로 치러진 이번 선거에서는 81.6%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여 회원들의 관심이 컸음을 반영했다. 정세영 회장은 대한약학회 60주년을 맞는 해에 취임하여 ‘지난 60년을 초석으로 향후 60년을 비상하여 세계약학의 중심으로 우뚝 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은 포부를 밝혔다. 대한약학회 60년사를 발간키로 하였으며 2011년 4월 21∼ 22일 부산 벡스코에서‘신성장동력으로서 신약의 발견과 개발’이라는 주제로 춘계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학술대회 동안 약학회 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잡 페어(job fair)’를 오픈하여 제약기업을 위한 인재발굴과 제약인력의 일자리창출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2011년 3월 1일에 는 15개 약학대학 신설 및 약학대학 6년제 첫 신입생이 입학하였다.

중국 약학회와 교류 협정 체결

2011년 5월 9일 대한약학회(회장 정세영)은 중국약학회와 상호교류를 위한 협약을 중국현지에서 체결하였다. 이로써 대한약학회는 2008년 일본약학회와의 협약체결에 이어 4년 만에 중국 약학회와의 협약체결에 성공함으로써 한·중·일 삼각교류 국제학술공동체 조성에 앞장서게 되었다.

한국제약협회 MOU 체결

한편 2011년 5월 13∼15일 대한의학회 주최 제33차 종합학술대회에서 ‘신약개발의 최신기류 에 관한 대한의학회·대한약학회 공동심포지엄’이 개최되어 의학과 약학의 공동연구발표가 이루어졌다. 이는 그동안 집행부가 양 단체회장의 총회참석과 축사 등의 공조노력결실로서 한국생명과학계의 양대 학술기관인 두 단체의 첫 번째 공동행사로서 의의가 컸다. 이후 매 학술대회에 공동심포지엄을 마련하는 쪽으로 발전되고 있다.
2011년 5월 23일 대한약학회는 제약산업과 약학발전을 위한 한국제약협회와 교류협력체결식 을 하였다. 앞으로 양 단체가 주관하는 학술행사를 통해 제약산업의 진보와 발전을 도모하자는 취지이었다. 6월 16일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청 중앙후생관에서 대한약학회 충청지부(지부장 이종 길 충북대교수) 창립총회 및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한약학회 내 영남지부, 호남지부에 이어 충청지부가 새로 설립되어 2011년 약대6년제 실시에 따라 신설약학대학이 늘어난 충청지역의 약학발전에 큰 기틀을 마련하였다. 2011년 8월 26일 서울 팔레스호텔에서 대한약학회는 ‘비처방의약품안전관리체계 구축방안’ 이라는 주제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는 당시 졸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약사법 개악으로 인한 의약품안전관리 허점을 지적코자 긴급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또한 대한약학회는 2011년 9월 2일 ‘미래성장동력의 하나로 표방되어 온 제약산업의 위기는 곧 국가의 위기’ 라며 복지부의 소위 약가제도 개편 및 선진화방안에 반대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같은 약학회의 대정부 및 사회활동은 특성상 연구실에만 안주하기 쉬운 약학자들에게 국가정책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현실참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로서 인식되었다.

대한약학회 창립 60주년

2011년 11월 7∼9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대한약학회 창립 60주년 기념 총회 및 추계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마시히로 니시지마 일본약학회회장과 샤오리앙 왕 중국약학회 부회장이 축하사절로서 함께 참석하여 한·중·일 약학교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대한약학회(회장 정세영)는 2012년 4월 19~20일 제주컨벤션센터에서 한국보건사회약료경영학회(회장 신현택), 한국생약학회(회장 김남재), 한국에프디시법제학회(회장 전인구), 한국응용약물학회(회장 김현표), 한국임상약학회(회장 이명구) 등 5개 학회와 연합하여 대규모 연합약학학술행사를 최초로 개최함으로써 대한민국 약학계의 집약된 역량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계획하였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조선약학회에서 한국인 약학자들이 펼친 학회활동도 있었지만 대한약학회는 1951년 12월 16일 공식 창립된지 60년이 지났다. 한사람의 개인도 육순이면 성숙한 인생의 만만치 않은 경륜이 쌓여진 나이이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과학인재 중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이룩한 대한약학회 60년 역사야말로 우리나라의 약학은 물론이고 한국 근·현대과 학의 산실이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지난 60년을 지나는 동안 세계 속에 우뚝 선 한국이 되었듯이 앞으로의 60년 동안에는 우리 약학회가 한국의 과학계를 선도하는 세계 속의 자랑스러운 대한약학회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강원대학교 약학대학 허문영

대한약학회 70주년, 약학회지 68주년의 발자취

하 1915년 6월 12일에 문을 연 ‘조선약학강습소(朝鮮藥學講習所)’는 우리나라 현대 약학교육기관의 효시였다. 그 한해 전인 1914년 1월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일본인 약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약학회(朝鮮藥學會)’가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조선약학회의 회원은 한국인 다수(전국 약업 관계자 망라)를 포함하여 99명, 초대 회두(會頭)는 일본인 고지마(兒島高里)이었다. 조선약학회는 1921년 1월 일본어로 발간되는 ‘조선약학회회보(朝鮮藥學會會報)’를 창간하였는데, 이 회보는 1927년부터 ‘조선약학회잡지(朝鮮藥學會雜誌)’로 이름을 고쳤다.
광복 후인 1946년 4월 13일 한국인 약학자들의 모임인 ‘조선약학회(朝鮮藥學會) (회장, 도봉섭, 부회장 한구동)’가 재창립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48년 3월에는 한글로 발간되는 ‘약학회지(藥學會誌)’를 창간하였다. 자연히 ‘조선약학회잡지’는 20여 년간의 수명을 마치고 소멸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조선약학회의 활동이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던 1951년 12월 16일 부산 시청에서 ‘대한약학회(大韓藥學會)’를 창립하여 활동을 재개하였다. 창립이라고는 했지만, 실은 ‘조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 때문에 ‘조선’을 ‘대한’으로 고친 것에 불과하였다. 학회의 이름은 바꿨지만 학회 회지의 이름은 ‘약학회지’를 그대로 계승하기로 하였다. 그 ‘약학회지’는 2016년 현재 68세 (Vol. 60을 발간 중)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약학회지’는 ‘조선약학회’보다는 두 살이 어리고 ‘대한약학회’ 보다는 세살이 많게 되었다.

오늘날 대한약학회의 나이는 ‘조선약학회(1914년 창립)’, ‘재창립 조선약학회(1946년 재창립)’, 또는 부산에서 창립된 ‘대한약학회(1951년 재창립)’ 중 어느 것을 모태(母胎)로 삼을 것인가에 따라 102세, 70세 또는 65세로 달라진다. ‘약학회지’의 나이도 1921년 창간된 ‘조선약학회회보’, 1926년 개칭된 ‘조선약학회잡지’, 또는 1948년 창간된 ‘약학회지’ 중 어느 것을 모태로 삼느냐에 따라 각각 95세, 90세 또는 68세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대한약학회’와 ‘약학회지’의 나이를 각각 몇 살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1914년 일본인 주도로 창립된 ‘조선약학회’보다는 아무래도 광복 후인 1946년 3월에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재창립 조선약학회’를 모태로 삼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2016년은 대한약학회의 창립70주년이 된다. 같은 논리로 약학회지의 나이도 68세가 된다.

그동안 우리나라 약학은 실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최근의 변화만 보더라도 2000년 7월 1일 의약분업이 시작되었고, 2009년부터는 소위 2+4년제의 약학교육이 시작되었으며, 이에 따라 2011년부터, 타학과에서 최소 2년 이상 공부를 마치고 약대 입시에 합격한 학생들이 약대에 입학하여 2015년부터 졸업하고 있다. 6년제 시행과 더불어 신설된 15개의 약학대학들이 각각 10-20여명 규모의 교수들을 채용하는 바람에 전국 약대 교수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남으로써, 우리나라의 약학 연구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조선약학강습소의 개교로부터 101년의 교육 및 연구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와 세계 약학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전망해 보는 것은 부분적으로라도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결론부터 제시하자면 21세기 약학은 신약개발학, 임상약학, 사회약학이라는 3대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어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1. 신약개발학 (新藥開發學, New Drug Development) 영역

우리나라 약학 연구의 미래는 ‘신약개발’에 최우선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 동안 국내 약업계는 1999년 최초의 신약 선플라주를 개발한 이래 2011년 말 현재 18개의 국산 신약과, 6개의 천연물 신약을 개발하는 개가를 올렸다. 특히 2015년에는 한미약품이 당뇨신약을 비롯한 총6건의 신약기술을 8조원에 수출하는 기적을 이루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약개발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약업계가 이 정도의 성과를 낸 것은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나라가 신약개발 강국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제약산업이 장차 우리나라에서 반도체 산업을 대체할 주력 먹거리 산업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마저 부풀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 1970년대까지는 대학에서 연구를 하려면, 시약은 고사하고 연구할 대상이 되는 약물 시료 자체도 구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당시의 연구 주제는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구 가능성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연구 결과도 대부분 겨우 국내에서만 발표될 수 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수준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에 들어서 신약개발이 제약업계의 화두(話頭)가 되면서 제약기업 및 대학에서의 약학 연구도 점차 신약개발에 초점을 맞추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 바람에 이제 모든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가 신약개발의 어느 단계에서 어떤 기여를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즉 모든 약학 연구자들은 ‘신약개발’이라는 분명한 목표에 자신의 연구 방향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목표가 불투명한, 단순히 연구를 위한 연구는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약학대학의 커리큘럼 또는 연구실 전공 이름도 자연히 구체적인 목표를 지향하는 이름으로 개편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약학이라는 연구 및 교육의 장(場)에서 영원히 도태(淘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정 학문의 도태 현상은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이지만 앞으로 더욱 그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약학 연구는 질적(質的)인 측면에 있어서, 세계 최고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 약학은 양적(量的)인 측면에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예컨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세계의 약학대학 중 가장 많은 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대학으로 정평이 나 있는 상황이다. 또한 국내 대부분의 약대는 그 약대가 소속된 대학교의 여러 학과 중 가장 많은 SCI 급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앞으로는 신약개발이라는 보다 분명한 목표를 지향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연구의 질적(質的) 수준도 세계 최고를 지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약학의 미래가 밝은 만큼, 연구에 종사하는 약학인들의 연구 경쟁도 그만큼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2. 임상약학(臨床藥學, Clinical Pharmacy)과 맞춤약학(Individualized Pharmacy) 영역

약학 교육 연한의 연장이 필요하다는 논의는 이미 1960년대의 전국 약대학장회의 등에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무려 50년이나 지난 2011년에 비로소 실현된 약대 6년제는 임상약학의 강화를 주된 명분으로 삼았다. 따라서 앞으로의 약학에 있어서 임상약학의 강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大勢)가 될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임상약학은 과거의 임상약학과는 다른 모습으로 진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약물유전학이 발달함에 따라 종래의 약물 요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들어나고 있는 것을 배경으로 한다. 1998년의 추계(推計)에 따르면 미국에서 입원한 환자 중 약 10만명이 약물부작용(ADR)으로 사망한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있다. 이는 환자 개개인의 유전적인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환자들에게 같은 약을 같은 양 투여(One-Size-Fits-All)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0년도 포츈지에 실린 ‘DNA의 비극(a DNA tragedy)’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1995년 미국에서 프로작[ProzacⓇ (fluoxetine)]이라는 강박장애 치료제를 상당 기간 복용한 9세 입양아 소년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조사 결과 이 소년의 혈중 프로작 농도가 엄청나게 높았다. 이 때문에 이 소년을 입양한 양부모는 프로작을 과다 투여하여 소년을 살해하였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 중에 그 소년의 간에는 이 약물을 대사시키는 CYP2D6라는 효소가 발현되어 있지 않아서, 상용량의 프로작을 투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혈중 약물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것이 사망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양부모의 살인 누명은 벗겨지게 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모든 환자에게 대사효소나 약물수송체(transporter)의 인종차 또는 개체차를 무시하고 동일한 약을 동일량 투여하는 종래의 One-Size-Fits-All 약물 요법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더 이상 수만~수십만명의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종래의 약물 요법을 그대로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약물요법은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임상약학은 ‘환자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을 고려한 ‘맞춤약학(Individualized Pharmacy)’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약물유전학(Pharmacogenetics) 또는 약물유전체학(Pharmacogenomics)을 바탕으로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을 고려한 약물요법의 최적화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맞춤약학 즉 유전적 특성을 고려한 환자 개개인의 처방전 재검토 및 복약지도는 21세기 임상약사의 직능을 부흥시킬 거의 유일한 방법론이 될 전망이다.
또 맞춤약학은 신약개발에 있어서도 새로운 활로가 될 전망이다. 과거에는 지구상의 모든 인종, 모든 환자에게 유효하고 안전한 약물만이 신약으로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약물이라도 소수의 인종이나 개인에게 부작용을 일으키면 신약 승인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대다수의 환자에게 절실히 필요한 신약도 정부의 승인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부작용을 일으키는 유전적 특성을 지닌 환자군을 사전에 식별하여 약물 치료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대다수의 환자를 안전하게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이러한 점을 고려한 임상시험계획을 승인함으로써 대다수의 환자에게 유익한 신약 후보물질이 임상시험에서 탈락하는 실패 리스크를 현저히 낮추게 될 것이다. 결국 맞춤약학은 신약개발의 리스크를 줄이는 데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요컨대 ‘맞춤약학’은 21세기의 임상약학과 신약개발의 두 영역에서 핵심적인 화두(話頭)가 될 전망이다. 2013년 발간된 우리나라 약제학 교과서에 ‘약물유전체학과 맞춤약제학’이라는 새로운 장(章)이 처음으로 추가된 것은 이와 같은 전망의 한 반영일 것이다.

3. 사회약학(사회약학, Social Pharmacy) 영역과 드라이랩(Dry Laboratory)

약학이 다루는 영역의 변화상을 보면, 과거에는 뚜렷하지 않던 연구 방향이 이제는 신약개발학과 임상약학이라는 분명한 지향점을 갖게 된 느낌이다. 이제 신약개발학과 임상약학은 약학의 핵심적인 가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약학의 핵심가치도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세포의 핵심가치는 세포핵(核, Nucleus)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포가 생존, 분화 성장하기 위해서는 세포핵은 반드시 주위에 있는 세포질(細胞質, Cytoplasm)과 세포막(細胞膜, Cell Wall)과 공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약학의 핵심적인 가치인 신약개발학과 임상약학도 주변 환경과 정보를 교환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마침내는 고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주변 환경도 결국은 핵심가치의 생사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주변환경과 정보를 주고받는 부분을 연구하는 학문을 넓은 의미에서 사회약학(Social Pharmacy)이라고 부를 수 잇을 것이다.

근래 전통적인 약학 실험을 함으로써 존재하는 연구실을 웻랩(wet laboratory)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비하여, 그런 실험을 주 업무로 하지 않는 연구실을 드라이랩(dry laboratory)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드라이랩에서 하는 연구의 대부분이 사회약학 계열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경우 이미 120여 년 전에 동경대학에 ‘위생재판화학 강좌’가 개설된 이래 현재 약 60개의 약대에서 다양한 이름의 사회약학 계열의 드라이 랩이 개설되어 있다.
라이 랩들의 이름은 의약정책학, 의료경제학, 파마코비지니스인벤션, 의약품정보학, 국제보건약학, 의약품안전성평가학, 약제정보분석학, 국제임상개발규제과학, 의약품개발구상, 의료정보해석학, 정보계량약학, 지역약국학, 구급약학, 의약품리스크관리학, 사회약학, 약국약사교육법학, 임상경제학, 보험약국학, 임상통계학, 의약개발학, 의료심리학, 약사관리학, 약사법제도, 지역의료약학, 정보약학, 약제역학, 의료경제학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사회약학 영역의 드라이랩이 이처럼 우후죽순(雨後竹筍) 격으로 생겨나는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신약개발학이나 임상약학 같은 웻랩만으로는 약학이 더 이상 효율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신약개발학, 임상약학과 사회약학이 균형있는 발전을 도모할 때 약학의 발전 속도는 상승작용을 나타낼 것이다.

약학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 일본에 못지않게 어렵다는 우리의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나라에도 사회약학 계열의 드라이랩이 시급히 개설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몇몇 신설 약대에 드라이랩이 신설되기 시작하였지만, 그 규모는 필요의 절실함에 비추어 볼 때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실정이다. 약대에 다양한 드라이랩을 개설하는 일은 약학계는 물론 제약업계와 약사회 나아가 사회로부터도 열렬한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약학의 블루오션이 될 전망이다.

맺는 말

21세기 약학은 방향(목표)이 불분명했던 과거와 달리, 신약개발, 맞춤약학(임상약학), 사회약학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진화할 것이다. 교육과 연구의 방향도 이 3대 목표에 일치하도록 조정될 것이다. 이 도도(滔滔)한 흐름에 거역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전공이나 약학자는 퇴보(退步)를 거듭한 끝에 소멸(消滅)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반면 이 변화를 능동적,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면, 21세기 대한민국 약학은 신약개발, 의약품의 안전사용, 의약품을 통한 복지사회 구현에 역사상 유례(類例)가 없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 국민, 전 인류의 복지 향상을 위한 세계 속의 대한민국 약학이여, 영원하라, 파이팅!.

참고문헌

  • 심창구 등, 한국약학사, 약학회지 51(6), 361-381 (2007).
  • 심창구, 송임숙, 약물유전체학과 맞춤약학, 생물약제학 제5장, 도서출판 한림원 (2013).
  • A. Teraoka and K. Tsutani, Past, Present and Future of the “Dry Lab” in Japanese Pharmaceutical Schools, 藥學史雜紙, 47(1), 67-89 (2012).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명예교수 심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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